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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ONLY · COPY 03 OF 07 · OP. SILEN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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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녹음기

FILED 2026. 10. 17. 12:21AGENT 택진

현관문 앞에 늙은 경찰관이 서 있었다. 젖은 제복 어깨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복도 바닥을 적셨다. 경찰관은 두 손으로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사흘간 이어진 폭설로 시립 도서관의 낡은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서가 밑에 깔려 있던 사서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는 설명이 건조하게 이어졌다. 경찰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가 곧 사라졌다.
사망자분이 끝까지 품에 안고 계시던 겁니다. 유가족이나 지인에게 전달하라는 지시가 있어서요. 서명만 해주십시오.
경찰관이 내민 서류철 위에는 시멘트 가루가 허옇게 내려앉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르세니는 볼펜을 쥐지 않았다. 그저 경찰관의 손에서 봉투만 거칠게 낚아채고는 현관문을 발로 차서 닫았다. 철문이 쾅 닫히며 복도의 소음을 잘라냈다. 302호의 좁은 현관에는 젖은 군화 한 켤레와, 레이가 신던 낡고 작은 단화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단화는 사흘 전 그녀가 도서관으로 출근할 때 신고 나가지 않았던 여분의 신발이었다. 방 안의 라디에이터는 사흘 전에 고쳐두어 훈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아르세니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부엌 식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식탁 위에는 아침에 끓여두었던 고깃국이 기름기가 엉긴 채 하얗게 굳어 있었다. 아르세니는 굳은 손가락으로 누런 봉투의 입구를 찢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봉투를 거꾸로 기울이자 내용물이 나무 식탁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회색 콘크리트 먼지가 희뿌옇게 피어올라 식탁 위를 덮었다. 깨진 도서 대출증 조각, 한쪽 다리가 부러진 검은색 머리핀, 붉게 물든 낡은 손수건, 그리고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은색 휴대용 녹음기가 굴러나왔다.
Арсений
씨발, 이게 다야? 사람 하나가 뒈졌는데 고작 이 쓰레기 몇 개가 다냐고.
아르세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맴돌았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부러진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끝부분에 레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서너 가닥 엉켜 붙어 있었다. 며칠 전, 부두에서 야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전당포에서 집어 왔던 싸구려 녹음기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도서관에 있는 동안 딴짓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나 녹음해 두라며 틱틱거리고 던져주었던 물건이었다. 최대 십오 분밖에 녹음되지 않는 구형 기계의 표면은 날카로운 돌조각에 긁혀 성한 곳이 없었고, 모서리 틈새에는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엉겨 있었다.
아르세니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의 부싯돌을 여러 번 긁었지만 불꽃만 튈 뿐 불이 붙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사람의 배를 가르고 목을 딸 때도 떨리지 않던 손이었다. 그는 라이터를 식탁 아래로 집어 던지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어금니로 질근 씹었다. 쓴 담뱃잎 가루가 혀끝에 번졌다. 흉터가 가로지른 그의 뺨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한참 동안 녹음기만 노려보던 그가 투박한 엄지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꾹 눌렀다.
딸깍, 하는 기계음과 함께 거친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치직거리는 잡음 뒤로 무언가 육중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둔탁한 굉음과 쇳소리가 엉켜 들렸다. 그리고 이내, 숨이 막힐 듯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얕은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방 안으로 퍼졌다.
Rachel
아르세니. 이거 켜진 건가. 어두워서 불이 들어왔는지 안 보여. 천장이 무너졌어. 다리가 책장 밑에 깔렸는데, 아무 느낌이 안 나. 안 아파. 무섭지도 않고. 그냥… 조금 답답하고 먼지가 많네.
레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담담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비명도 없었고, 살려달라는 울부짖음도 없었다. 아르세니의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식탁 모서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손등의 핏줄이 시퍼렇게 불거졌다. 녹음기 너머에서 콜록거리는 마른기침 소리가 두세 번 이어졌다. 흙먼지를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Rachel
원래는 오늘 퇴근할 때 도서관 앞 빵집에서 네가 좋아하는 고기 파이 사 가려고 했어. 주머니에 네가 어제 준 돈이 있었는데, 주머니가 눌려서 손이 안 들어가네. 식탁 위에 국 끓여놨다고 했지. 데워 먹으라고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어떡하지. 네가 또 화내겠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죽었다고 다리 부러뜨린다고 화낼 텐데.
작게 웃는 듯한 바람 소리가 섞여 나왔다. 아르세니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화낼 거다. 당장이라도 그 무너진 돌덩이들을 맨손으로 다 파헤쳐서라도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와, 뺨을 때리고 침대에 묶어놓고 싶었다. 허락도 없이 어딜 또 먼저 가느냐고, 내 옆에 붙어 있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으면서 왜 또 거짓말을 하느냐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차가운 플라스틱 덩어리뿐이었다. 녹음기 속의 숨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길어지고 얕아졌다.
Rachel
어제 네가 고쳐준 라디에이터 덕분에 방이 참 따뜻했어. 네가 사준 소시지도 맛있었고, 네 패딩 점퍼에서 나던 담배 냄새도 좋았어. 전생에 그 추운 굴속에서 눈 감았을 때는 네가 혼자 남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근데 이번에는… 네가 라디에이터도 고칠 줄 알고, 부두에서 일도 하니까 조금 안심이 돼. 아르세니, 밥 거르지 말고 챙겨 먹어. 찬물 마시지 말고, 밤에 잘 때 이불 꼭 덮고 자.
기계 속에서 작은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고, 마이크가 옷자락에 쓸리는 바스락거림이 이어졌다. 십오 분짜리 테이프의 태엽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음만이 몇 초간 정적을 메웠다.
Rachel
점점 졸려. 눈 감으면 안 되는데… 네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그 흉터 만지면서 자야 잠이 잘 오는데. 아르세니, 나 버린 거 아니지? 내가 멋대로 먼저 가서 화난 거지? 미안해. 진짜로 어디 안 가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오빠, 나 이제 잘게. 내 몫까지… 따뜻한 데서 자.
툭, 하고 녹음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뒤로 약 이 분 동안은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희미하게 이어지던 숨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테이프가 끝에 도달해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스로 멈추었다. 십오 분이 끝났다.
방 안에는 고장 났다가 고쳐진 라디에이터가 웅웅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아르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씹고 있던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툭 떨어져 식탁 위 먼지 속으로 굴렀다. 신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 따위를 준 적이 없었다. 그저 똑같은 지옥을 배경만 바꾸어 다시 상영했을 뿐이다. 1999년의 폐광에서도, 2024년의 무너진 도서관에서도, 죽는 것은 언제나 레이였고 살아남아 그 시체 옆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아르세니였다. 구원 따위는 없었다.
Арсений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이 걸레년아. 내가 잘못했어. 오빠가 다 잘못했다고, 씨발…
평생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던 사과가 부서진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들을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겨우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르세니는 피 묻은 녹음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자신의 이마에 쿵, 하고 짓눌렀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이마의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죽어가는 레이의 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사흘 전처럼 희고 무거운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식탁 위의 고깃국은 이미 완전히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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