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FILEMINITRUE / RECORDS DEPT.100%TOP SECRET
O/Modern AU
1년 후 편지
야, 걸레년아. 잘 처자고 있냐.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거지 같은 시간은 네가 없어도 지 멋대로 굴러가서 또 겨울이 왔어. 오늘도 창밖에는 작년이랑 똑같은 눈이 내린다. 지겹지도 않은지 하얗게 쌓여서 온 동네를 다 덮고 있어. 난 지금 네가 마지막 날 아침에 끓여놨던 그 식탁 앞에 앉아 있다. 평생 펜대 같은 건 잡아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남았는지 모를 볼펜 하나 쥐고 네가 보지도 못할 종이 쪼가리에 이딴 글이나 싸지르고 있어. 손가락이 굳어서 글씨가 삐뚤빼뚤 개판이다. 네가 봤으면 또 아무 말 없이 그 보라색 눈으로 빤히 쳐다봤겠지. 배운 게 없어서 쓰는 말도 거칠고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지껄이는 대로 적어본다. 어차피 읽을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씨발.
네가 그 도서관 밑에 깔려서 허락도 없이 가버린 날부터 오늘까지, 난 하루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어. 네가 남긴 그 싸구려 녹음기, 테이프가 늘어져서 소리가 찢어질 때까지 매일 밤 틀어놨다. 처음 몇 달은 진짜 미쳐 돌아가는 줄 알았어. 술을 처마셔도 취하지가 않고, 벽에 머리를 박아도 피만 날 뿐이지 네 목소리가 귓가에서 안 떨어지더라고. 경찰 새끼가 주고 간 그 누런 봉투 안에 있던 네 부러진 머리핀이랑 피 묻은 손수건, 그거 아직도 내 베개 밑에 그대로 있어. 머리핀 끝에 붙어 있던 네 검은 머리카락 서너 가닥, 그거 끊어질까 봐 만지지도 못하고 매일 밤 눈으로만 본다. 이 덩치 산만한 새끼가 고작 머리카락 몇 가닥 앞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빌빌거리는 꼴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볼까. 처음엔 네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무너진 도서관 근처를 매일 기웃거렸어. 인부들이 돌무더기 치우는 걸 구석에서 담배만 뻑뻑 피우면서 하루 종일 구경했다. 혹시라도 그 밑에서 네가 그 낡은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맨발로 걸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아픔도 무서움도 모르는 바보 같은 년이니까, 돌멩이에 좀 깔렸어도 아무렇지 않게 털고 일어나서 내 이름 부르면서 걸어 나올 것만 같았거든. 근데 며칠을 기다려도 넌 안 나오더라. 화장터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재로 바뀌어서 차가운 단지 안에 들어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집에 돌아오면 현관에 놓인 네 작은 단화가 눈에 밟혀서 또 네가 방 안에 있는 줄 착각했어. 문 열면 네가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날 올려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 손잡이 잡고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서 집구석 물건을 다 때려 부쉈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또 날 혼자 두고 가냐고 소리 지르면서 미친 새끼처럼 날뛰었다. 전생에도 그랬잖아. 1999년 그 빌어먹을 크리스마스에, 폐광 속에서 내 품에 안겨서 숨이 멎었잖아. 그때 네 심장이 멈추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죽어도 모를 거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았고, 네 시체 옆에서 나도 그냥 얼어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 다시 이 세상이었고, 스물몇 해를 너 없이 지옥 같은 개미굴에서 구르다가 겨우 널 다시 찾았는데. 고작 며칠이었다고, 레이. 내가 널 다시 내 방에 가두고, 네 살갗을 만지고, 네 숨소리를 들으면서 산 게 고작 며칠밖에 안 된다고. 신이라는 새끼가 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뺏어갈 거면 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한 거냐고. 두 번이나 내 눈앞에서 널 죽게 만든 이유가 대체 뭐냐고.
내가 다 망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널 죽인 거나 다름없어.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이나 정리하면서 살던 널 억지로 차에 태워서 끌고 온 게 나잖아. 전생의 기억 따위 나 혼자만 안고 뒈졌으면 됐는데, 네 얼굴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내 것 만들겠다고 난리를 쳤지. 네가 그 도서관에 출근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말렸어야 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이 침대 위에 묶어놨어야 했어. 내가 전에 협박했었잖아,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침대에 묶어놓고 하루 종일 울게 만들 거라고. 차라리 진짜로 그렇게 할걸. 내 패딩 점퍼 입혀서 내 옆에만 끼고 있었으면, 그날 폭설이 내리든 지붕이 무너지든 넌 내 품에서 따뜻하게 살아 있었을 텐데. 내가 부두에서 돈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새벽같이 나가는 바람에, 네가 그 고기 파이 사 오겠다는 생각으로 거길 갔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내 욕심 때문에, 이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새끼가 남편 노릇 한 번 해보겠다고 설친 것 때문에 네가 죽은 거야.
죽기 사흘 전인가, 내가 네 가슴팍에 대고 저주라고 소리 지르고 나갔던 거 기억나냐. 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다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마음에 없는 개소리를 지껄였었지. 그날 네가 그 추운 복도에 얇은 옷만 입고 맨발로 서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만 감으면 떠올라서 미치겠어. 얼음장 같던 네 발을 내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고 녹여주면서, 속으로는 천 번 만 번 빌었었다. 제발 날 버리지 말라고, 어디 가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쓸데없이 세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하고 오히려 너한테 화만 냈지. 귀 막혔냐고, 개소리라고 했잖아 하면서 소리나 빽빽 지르고. 난 평생 그 모양이었다. 너한테 예쁜 말 한마디 해줄 줄도 모르고, 불안하면 주먹부터 나가고,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네 몸을 거칠게 다루기만 했어. 네 목을 조르고, 벽에 밀어붙이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이나 주면서 그게 내 방식대로 널 사랑하는 거라고 착각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옆에서 넌 한 번도 도망치지 않고 그저 순하게 웃어주기만 했는데.
너는 왜 한 번도 날 원망하지 않았냐. 전생에 내가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걸 알면서도, 넌 내 손에 죽어가는 순간까지 내 걱정만 했지.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어. 그 무너진 책장 밑에 깔려서 숨이 막혀 가는데도, 네가 녹음기에 남긴 말은 전부 내 걱정뿐이더라. 밥 거르지 말라고, 찬물 마시지 말라고, 이불 꼭 덮고 자라고. 내 얼굴에 난 흉터 만지면서 자야 잠이 잘 온다고, 먼저 가서 화난 거 아니냐고 묻던 네 목소리가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화 안 났어, 레이.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냐. 잘못은 내가 다 했는데.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넌 끝까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눈을 감았어.
네가 가고 난 뒤에 고쳐놓은 라디에이터는 겨우내 잘만 돌아가더라. 네가 그토록 따뜻하다고 좋아했던 방인데, 정작 그 온기를 느낄 네가 없으니까 이 방은 전생의 그 얼어붙은 폐광보다 더 추워. 네가 말했던 도서관 앞 빵집, 거기 아직도 장사하더라. 몇 달 전에 부두에서 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그 앞을 지나가다가, 홀린 듯이 들어가서 고기 파이를 두 개 샀어. 네가 마지막 날 주머니에 돈 넣고 사 오려고 했다던 그 파이 말이야. 집에 와서 식탁에 하나는 네 자리에 놓고, 하나는 내가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는데, 밀가루 반죽이랑 고기 조각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지도 않더라. 체할 것 같아서 찬물 마시려다가, 네가 찬물 마시지 말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주전자에 물 끓여서 마셨다. 나 참 말 잘 듣지. 살아있을 때나 좀 이렇게 말을 들을걸 그랬어.
냉장고는 이제 텅 비어 있지 않아. 네가 차가운 소시지 묵묵히 씹어 먹던 거 보고 가슴이 문드러졌던 게 한이 돼서, 돈 생기는 대로 고기랑 빵이랑 과일 같은 거 잔뜩 사다 채워 넣는 버릇이 생겼거든. 근데 사다 놓으면 뭐 해.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데. 유통기한 지나서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대로 두다가 쓰레기봉투에 다 처넣고, 다음 날 또 사 와서 채워 넣는다. 미친 짓인 거 아는데, 냉장고가 비어 있으면 네가 그 차가운 소시지 먹던 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 아침에 일어나면 너 주려고 물부터 끓여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도 똑같다. 김이 다 빠지고 물이 얼음장처럼 식을 때까지 그 컵만 바라보다가 싱크대에 버려. 내 하루는 매일 그런 식이야. 네가 있던 흔적들을 지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널 따라 죽지도 못하면서 유령처럼 이 방구석을 떠돌고 있어.
왜 안 따라 죽었냐고 묻고 싶냐. 처음엔 진짜로 끝내려고 했어. 네가 없는 세상에 미련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부두 앞 시커먼 바닷물에 그냥 몸을 던질까, 아니면 목이라도 매달까 수백 번도 더 생각했다. 근데 네가 마지막에 그랬잖아. 오빠, 내 몫까지 따뜻한 데서 자라고. 밥 챙겨 먹고 살라고. 그 말이 족쇄처럼 발목을 잡아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겠더라.